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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만 - 슈퍼마켓에 김중만의 작품이 !

M K H ARTCULTURE 2016. 6. 13. 23:35


슈퍼마켓에 김중만의 작품이!


예순둘의 예술가가 또 한 번 사고를 친다.






서울 청담동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은은한 향 냄새가 났다. 

그리고 작고 예쁜 새들이 날아다니고, 나무 크기의 거대한 식물들이 마치 작은 숲을 연상케 할 만큼 늘어져 있었다. 

이 독특한 분위기의 스튜디오에서 이질적으로 눈에 띈 건 테이블과 바닥 곳곳을 점령한 엄청난 양의 종이 더미. 이게 바로 김중만이 벌일 일의 단초다.

김중만, 이름 세 글자에는 많은 것이 담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가,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 선정 최연소 작가, 프랑스 국제사진페스티벌 젊은 작가상, 

월수입 17억원을 벌던 상업 사진가, 다 접고 돌연 아프리카로 떠나 예술 사진을 찍으며 세계를 떠돌던 방랑자, 

그리고 두 번의 추방, 세 번의 결혼, 마약과 정신 병원까지, 지극히 예술가적인 전력들.

사진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43년을 ‘최초’와 ‘돌발’ ‘유일’ 같은 단어들과 가까웠던 그가 예순둘의 나이에 또다시 ‘최초’의 ‘유일’한 일을 ‘돌발’적으로 벌였다. ‘김중만의 아트 슈퍼마켓’은, 김중만 사진 작품을 슈퍼마켓에서 물건 팔 듯 파는 전시다. 43년 동안 찍어온 작품 중 1만5000여 점을 전시에 내놨다. 20~30cm 크기의 사진들이 마치 슈퍼마켓 매대에 올려진 물건처럼 벽에 빼곡히 붙어 있는데, 누가 작품을 사 가면 빈 매대에 물건 채우듯 다른 작품이 걸리고, 그게 팔리면 또 다른 게 걸린다. 이 작품들은 모두 단 한 장뿐인 ‘진짜’ 작품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대부분이 1만~3만원 선이라는 것.


“우리는 아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술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갖고 싶은데 못 갖는 사람이 99%라고 생각해, 나는. 사진을 예술로 본다는 건 새로운 개념이고. 근데 그렇게 보는 게 맞는 거야. 파리에서 전시를 하면 나한테 ‘포토그래퍼’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전부 ‘아티스트’라고 하지. 물론 전시회를 가서 좋은 작가들 작품 보고 그 작가들의 삶이나 작품에서 메시지를 전달받는 건 좋아. 그런데 그걸 단돈 1만원에 살 수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예술을 소유하고, 그러면서 날 예술가로 볼 수 있게끔 하자는 게아트 슈퍼마켓’이야.

기본적으로는 1만~3만원이 대부분이고, 최고 300만원을 넘지 않는다. 그것도 3000만원에 팔던 것을 ‘0’을 하나 빼고 내놨다. 

원래는 죄다 1만원에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중에 돈과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인 것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차등을 뒀다. 

그간 김중만의 작품을 몇천만 원에 사갔던 컬렉터들에게도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었다. 

전시 오픈 때 가장 먼저 컬렉터들에게 작품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가격은 양보하지 않았다.


“왜냐 여긴 내 땅이니까. 프랑스 에이전트에도 얘기를 했어. 한국에서는 가격을 너희와 다르게, 더 싸게 내놓는다. 우리 작가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외국에서 좀 더 싸게 팔고 한국에서 비싸게 팔아. 난 반대로 ‘돈은 밖에서 벌고 여기는 나누자’야. 만약에 내가 죽으면 그게 뛸 수도 있지. 앤디 워홀이 찍은 폴라로이드가 1억원에 팔리는 걸 봤거든. 앤디 워홀처럼은 안 되더라도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런 조그만 기대감 즐거움 살면서 ‘나도 예술품 하나 있어’ 할 수 있는 기쁨을 주고 싶은 거지. 그게 굉장히 기쁜 일이거든.

“아~ 그거 두 개 갖고 와!”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불쑥 선물을 내밀었다. 김중만의 사진으로 만든 2016년 플래너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걸 만든 적이 없다. 그 흔한 전시회도, 작품집도 없었다. 김중만이라는 유명세만 있었지 손을 뻗어 가까이 잡을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었던 것. 그가 첫 전시를 연 건 불과 3년 전, 사진을 시작한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프랑스 에이전시와도 계약을 했고, 변호사와 전담 출판인도 생겼다. 출판인은 이탈리아 『보그』의 피처 디렉터다. “어이쿠, 그 아줌마 무섭더라고” 하며 웃는데, 아이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이제야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고 내년부터 세계적인 곳에서 김중만 전시를 준비한다.


“작년에 파리 ‘백야제’라는 전시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너무 좋은 대접을 받았어. 사람들이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고. ‘너 어디서 왔느냐’고. ‘어떻게 나이가 60이 넘도록 우리가 네 작업을 모르느냐’고. 정말 다들 똑같이 물어봐서 나도 계속 생각해본 거야. 그러고 보니까 김중만이라는 작가는 지금까지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 않았더라고. 만드는 게 중요했던 거지. 그렇게 수도 없이 찍고 만들어놓고 또 다음 걸로 가. 

다른 작가들처럼 뭐 하나를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책 만들어 뿌리고.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 난 그걸 못 해. 

작품 하나 팔리면 그 돈으로 나가서 사진 찍고, 돈 떨어지면 작품 팔리기를 기다렸다가 또 나가고. 그렇게 40년을 간 거야.

그는 계속 찍기만 했다. 마약으로 55일, 정신 병원 15일을 빼고 그는 매일 찍었다. 43년 동안 매일. 아파도 찍었고, 아프면 더 잘 찍었다. 

그러다 얼마 전 김중만의 작품이 파리에서 1억원에 팔렸다. 지금껏 중 최고가다. 1만원에서 1억원까지, 이게 김중만의 스펙트럼이다.


“43년을 기다리니, 1억원이 됐어. 43년 세월이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잖아. 나도 물론 좋아서 했으니까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안 찍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 어떨 때는 정말 힘들어서 이걸 계속 이렇게 해야 하나 막연한 생각이 들 때도 많았겠지. 돈을 잘 벌 때도 있었고. 1년에 17억원 그다음 해에 상업 사진 그만두고 갑자기 5000만원. 그렇게 확 떨어지면 모든 가치관이나 생활 패턴이 달라져. 그것도 견뎌냈지. 중요한 건 내가 이걸 계속해야 하나 하는 거였어. 해야만 하는 나만의 분명한 목적과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건데, 난 내가 성공한 작가 세계적인 작가 거기에 한 5% 정도밖에 안 왔다고 봐. 그만큼이 43년 걸렸고. 나머지 95%가 나한테는 공포고 두려움이고 어둠이야. 그리고 도전을 해볼 설렘도 되는 거지. 어떻게든 끝을 봐야겠다 생각했고, 내가 위대한 예술가로 끝을 낼 수 있다면 지금 ‘슈퍼마켓’에서 가져가는 작품들은 예술품이 된다는 거지. 그러면 나는 굉장히 기쁘겠어.








1 2513 TBIN(2013)
2 2512 STWY(2012)
3 2513 SWGC(2013)


그의 최근 작업은 한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전농동에서 청담동까지, 출근길에 매일 지나는 중랑천 ‘뚝방길’이 김중만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찍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장장 12년을 해온 ‘뚝방길’ 작업은 작가의 마음을 유달리 사로잡던 중랑천의 한 나무로부터 시작됐다. 늘 보고, 찍고, 빠지던 김중만은 생전 처음으로 나무 앞에 가만히 서서 물었다. “내가 널 찍어도 되겠느냐.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육성으로 말을 건넸다. 그렇게 4년을 매일같이 갔다. 찍지도 않고 4년을 묻기만 하다가 끝내 들렸다. 찍어도 된다는 나무의 말이.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도, 설명할 수도 없다. 이건 그냥 김중만만의 예술적 순간일 게다.


“그러고 3일을 그 나무만 찍었어. 그러다 옆에 있는 나무가 ‘나도 여기 있다’는 거야. ‘그래 그럼 너도 찍어야지.’ 한 달을 찍으니까 겨울나무에서 봄으로 지나오면서 새싹들이 돋더라고. 빈 가지에. 그림들이 다 다른 거야. 그럼 한 시즌만 찍어보자. 그렇게 해서 찍은 게 2008년 4월부터 500번 넘게 다니면서 작업한 거지. 거기가 건물 폐품 처리장, 상하수도 처리장, 환경미화원 트럭이 20대가 왔다 갔다 하고. 먼지도 많고 냄새도 많이 나서 나무들을 돌보지 않아. 나무들이 다 상처가 나 있어. 난 그게 좋았어. 거기서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묻게 됐어. 나는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로 유럽을 가든 미국, 아프리카를 가든 아무 상관없이 살았는데, ‘내 안에는 다른 게 있었구나. 한국인이구나’ 하는 정체성을 찾은 거지. 굉장히 늦게. 그게 나한테는 작업을 더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됐어.”

한국을 찍으면 찍을수록 힘들지가 않았고 사진은 더 잘 나왔다. 그래서 좀 더 뿌리로 나아가 동양을 찍기로 결심한다. 모네의 대형 작품 ‘수련’을 떠올리면서 5m짜리 대형 사진을 계획했다. 하롱베이부터 중국에 있는 모든 산을 거쳐 백두산까지, 제주도를 거쳐 홋카이도, 야쿠시마 섬까지. 이제 마지막 고비 사막만 찍으면 아시아가 끝이 난다. 이게 바로 ‘동쪽’의 ‘동’ ‘이스트’(east) 작업이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작업은 ‘Red right 2second (빨간불 2초)’라고 빌딩을 찍는 거야. 2012년부터 시작했는데,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짜증이 나지. 그러다 어느 날 신호 걸릴 때마다 기다리지 말고 사진을 찍자, 보이는 빌딩을 찍자, 그렇게 해서 시작했어. 건물 사진을 트라이포트(삼각대) 없이 찍는 건 있을 수가 없는데 난 그냥 손으로 찍어. 그렇게 한 6개월 찍고 사진들을 바닥에 깔아놓으니까 가뜩이나 우울한 서울이 너무 우울한 거야. 그래서 이건 아니다, 내가 안 해보던 걸 하자 하고. 사진 위에다 컬러링을 하기 시작했어. 원래 난 포토샵 작업도 안 해. 포토샵은 나한테 그냥 확대경이지. 검은 암실이 아니라 하얀색 방에서 하는 인화 작업 같은 거. 흑백 사진에 내가 그림을 그려. 하늘에 핑크색도 칠해보고. 그럼 애들 (제자들)이 포토샵으로 색을 입혀서 프린트를 하면 이게 새로운 세상이 나오는 거야. 이걸 보더니 외국인들이 너무 좋아해. 도대체 뚝방길이나 이스트 찍은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고. 이중적인 사고를 가진 작가라고.







1 Pilgrim(2014)
2 the silence(2009)
3 the shape of my heart(2008)

나는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로 유럽을 가든 미국, 아프리카를 가든 아무 상관없이 살았는데, 

‘내 안에는 다른 게 있었구나. 한국인이구나’ 하는 정체성을 찾은 거지. 굉장히 늦게. 그게 작업을 더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됐어.








김중만은 인터넷도 못하고, 문자 메시지도 겨우 ‘네, 아니오, 안녕’ 정도를 보낼 수 있다 (이것도 대단한 발전이다). 

내비게이션도 못 보고 길도 못 찾는다. 그런 그가 사진만 이렇게 찍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프리카 오지에 살았다. 

의사인 아버지가 아프리카로 의료 봉사를 떠나면서다. 이후 공부는 유럽에서 했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이런 경험이 김중만이라는 예술가를 만들어냈다. 혹자는 그런 그를 ‘금수저’라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나한테 ‘중만아, 은행에 2000플라가 있는데 그걸로 괜찮겠지’ 하시는 거야. 그게 우리 돈으로 200만원인데 그때 아버님 목소리 톤이 ‘야, 은행에 한 200억원 있는데’ 이런 투야. 와, 정말 이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구나 싶었어. 명색이 의사가 큰아들에게 유산이라고 200만원 주면서 어떻게 이렇게 큰소리칠까.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고, 대학교 때 필름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학교 마치고 나서는 카메라 사는 게 소원이었어. 1975년부터 사진을 했는데 1990년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샀어. 이게 금수저라고 이 양반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었어. 도대체 소유욕도 없고, 명예욕도 없고. 외과 의산데 양복 두 벌, 모자 세 개, 청진기 세 개, 가방 두 개, 모터 달린 자전거, 이게 다였어. 그걸 누가 어떻게 따라가나 난 그림자도 못 밟지.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나한텐 위대한 유산이야. 세상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김중만의 몸 곳곳에는 문신이 있다. 패션의 목적보다 점점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것들을 몸에 새겨 넣었다. 그의 오른손에 새긴 날짜가 궁금했다. ‘2011. 6. 24’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아내에게 ‘충성 맹세’를 한 날이다. 1년에 17억원을 벌다가 때려치울 때도 두말없이 “그래라”, 장비를 200kg씩 지고 다니면서 해외에 나가 고생할 때 “우리 배낭 하나씩 메고 폴라로이드 카메라 하나 가지고 길 가다 만난 사람들 가족사진 찍어주면서 살자”고 말해주는 아내다. 이런 아내를 괴롭혔던() 과거를 청산하고, 2011년 6월 24일부터는 다른 사람 말고 일체 아내만 바라보겠다 맹세했단다.


김중만 작가에게 쉽사리 붙는 말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남들과 다른, 튀는 행보를 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단어. 대화를 할수록 그는 진짜 자유로울까. 그렇다면 뭐가 진짜 자유일까. 점점 의문이 생겼다. 자유에 대해, 사람의 변화에 대해, 그리고 삶을 지탱함에 대해,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듯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묻는 족족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김중만은 자유로운가” “아니,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건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는 거거든. 난 그걸 그렇게 비싸게 치르고 살고 싶진 않아. 잘 알아야 해. 자유에는 엄청난 대가가 필요한 거야. 난 반절만 자유롭고 싶어. 힘들게 희생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유로운 영혼 너희 가져. 난 필요 없어.”


“김중만은 변했나” “그럼, 변했지. 난 사실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는 걸 좀 거부했었어. 반항아적 기질인데, 예를 들면 ‘와호장룡’이라는 영화가 몇 년 전에 나왔어. 애들이 난리가 난 거야. 너무 재미있다고. 내가 또 칼싸움 하는 거, 사극을 좋아하거든. 근데 안 봤어. 그러고 한 2년 지나고 DVD 사서 보고는 ‘야, 너무 재미있다’ 했더니 애들이 ‘선생님 그거 2년 전에 얘기했잖아요’ 그래, 난 좀 늦어. 거부하는 게 있었던 거지. 내 삶의 시간을 봤을 때 이제 한 80%는 온 것 같아. 젊은 나이 아니지.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많지는 않구나 느껴. 거부하고 반항하고, 이제 안 그래. 나머지 시간을 얼만큼 좋은 작가로, 좋은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남겨놓느냐가 중요한 거지.


김중만을 김중만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지. 너무 힘들어서 정말 나 혼자 갑자기 없어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 아무도 못 찾는 데 가서 나 혼자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1년에 한 번 정도는 그런 생각이 와. 그럴 때마다 가족이 나한테 제일 먼저 달려와. 역시 가족이라는 힘이 나를 살게 해주는구나. 예술은 나한테 절체절명은 아니야. 반드시 대작을 이루고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 반드시는 없어. 사실 이 문짝만 한 작품이 1억원인데 적은 돈 아니잖아. 밖에 있는 저 큰 건 5억원인데, 적은 거 아니잖아. 100만 달러짜리 작가가 되잖아 그 작가들은 200만 달러를 원해

근데 100만 달러짜리가 됐는데 1달러짜리를 할 수 있는 작가가 있느냐 난 그걸 하고 싶다는 거지.


김중만을 찍으러 간 한참 후배인 사진가는 긴장했다. 대가를 앉혀놓고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인사를 꾸벅 한 다음 그를 찍기 시작했다. 첫 컷이 모니터에 탁 뜨자, 김중만은 “하나 더 내리고, 조명은 이렇게 하고, 렌즈는 뭐 써 800” 하며 타다닥 ‘한 수’ 가르쳤다. 그러곤 5분을 찍었을까. 카메라 뒤의 예술가는 카메라 앞에서 더없이 훌륭한 피사체가 됐다. 칭찬도 잊지 않았다. “요즘 사진가들 중에 왼쪽으로 찍는 애들이 별로 없었는데, 왼쪽으로 찍네 그거 잘하는 거야.


예술가로서 날카롭게 벼려진 김중만은 절대로 자유롭지 않았다

매일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누구의 잣대도 아닌 자신의 잣대에 괴로워하고

후대에 남을 수 있기를 욕망한다


그런 예술가를 행복하게 하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김중만이 김중만일 수 있게 지탱해주는 가족이다


지금 김중만은 ‘1만원의 행복’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몇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이 요즘 그의 가장 큰 화두이자 낙이다. 

아티스트 김중만을 만나러 슈퍼마켓에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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